이강전 / 다모아컴

 

세운상가 야외 데크 왼편에는 푸른 간판을 달고 있는 ‘다모아컴’이 있다. 쓸쓸한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환한 불을 밝히고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 유달리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 만난 이강전 사장님과 해가 지도록 오랜 이야기를 나눴다.

 

간단한 소개와 하시는 일에 대해서 말씀 부탁드립니다.

컴퓨터에 관련된 건 모두 다 해. 현대상가에 있을 때부터 4층에 컴퓨터 관련 일을 많이 했었지. 옛날에는 내가 디스크드라이브를 직접 생산해서 시장이나 전국의 업자들한테 팔면서 컴퓨터 쪽 일을 시작했었어.

그러다가 이 일대 철거한다고 쫓겨났을 때, 한 2년 동안 세운스퀘어에서 공백기를 가졌다가 다시 여기로 와서 똑같은 일을 시작했지. 그런데 점포가 좁다보니까 컴퓨터나 프린터 등을 쌓아두고 전시해서 팔기는 힘들었어. 이제는 고정적인 거래처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조립해서 주거나 메이커 PC를 설치해주는 일 정도를 하고 있지.

현재는 컴퓨터 주변 기기에 들어가는 소모품, 프린터 토너라던가 잉크 등을 주로 많이 거래하고, 컴퓨터 메모리 쪽도 많이 다뤄. 컴퓨터 자체는 요즘 인터넷으로도 많이 사니까 고정적인 거래처 말고는 신규업자가 와서 사가는 경우는 거의 없지. 개인 손님이 와도 예전부터 많이 왔었던 사람들이나 오지, 지금 여기가 상권이 많이 죽었고 철거되었다는 오해도 받고 있어서 안 와.

 

어떻게 컴퓨터 제품을 팔게 되셨나요?

나는 올림픽 전부터 일을 했어. 처음에는 조그만 개인회사에서 일했었지.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가 삼성이나 대우에서 ‘S-PC’ 같은 컴퓨터를 만들 때였어. ‘이행전기’에서 만든 ‘사이보그’ 같은 컴퓨터도 있었고, 예전에는 이 세 곳에서 간단한 컴퓨터를 만드는 게 우리나라 컴퓨터 산업의 전부였어. 대만이 우리보다 컴퓨터 산업 발달이 2,3년 빨랐어. 일본은 별도의 CPU 계열을 채택해 만들 정도의 기술이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애플 컴퓨터를 복제하는 방식으로 시장에 나왔지. 그때 ‘고명전자’, ‘홍익전자’, ‘서경전자’ 이 세 곳에서 애플컴퓨터를 복제해서 만들기 시작했었어. 나는 그때 홍익전자에서 일하고 있었지. 그 당시에 대학교에서 쓰는 컴퓨터들도 많이 비싸니까 수입을 해서 사지를 못했어. 그래서 시장에서 복제해서 만든 애플 계열의 컴퓨터들을 사다가 학생들에게 쓸 수 있게 해줬지.

그리고 그땐 저장장치가 없으니까 카세트테이프에 소프트웨어를 저장해서 들여왔었어.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서 디스크 드라이브가 나왔지. 지금 우리 외장 하드처럼 케이블로 연결이 되는 거지. 애플컴퓨터 뚜껑을 열면 여러 카드가 꽂혀 있어. 그래픽이나 프로그램 연산을 담당하는 카드 등이 있단 말이지. 그럼 거기에다가 카드를 꼽아서 디스크 드라이브가 연결되면 디스켓 큰거 그걸 집어넣고 프로그램 도스를 쓰기 시작한 거야.

디스크 드라이브가 처음 나올 적에 정부에 줄이 있는 사람들이 수입이 안 되는 전산제품들을 별도로 허가를 받아서 대만에서 나온 ‘마이탁’이나 미국회사에서 나온 디스크 드라이브를 수입을 해왔어. 그걸 수입하는 사람들은 돈을 무지무지 많이 벌었지. 나도 국산화 계획서를 작성해 상공자원부에서 수입추천서를 받아다가 해외회사에서 수입을 정식으로 했었어. 완제품을 수입 할 수 있었던 건 아니고, 부품 일부만 들여올 수 있었어. 그럼 그걸 수입하고 인터페이스는 내가 만들어서 프로그램 세팅한 후 그걸 학교나 회사에 파는 거지. 그렇게 해서 판매를 시작했어.

그렇게 쭉 하다가 88올림픽 지나고 회사를 나와 독립했지. 디스크 드라이브 생산하는 사업을 시작했어. 그때는 현대상가 제일 꼭대기에 사무실을 얻어서 했지. 전국 대도시에서 컴퓨터를 쓰는 모든 사람들이 고객이었어. 그런 와중에 컴퓨터는 점점 발달해서 XT라는 컴퓨터가 나왔다가 AT, NEW AT, 386, 486, 586, 펜티엄… 이런 식으로 발전했지.

 

잘 알고 계시네요. 학교 다니실 때 이 분야를 전공하셨나요?

전자 쪽으로는 내가 공부를 좀 했어. 직장이 전자회사였고, 전자회사에서 사장님이랑 같이 이야기해서 애플 컴퓨터를 만들기 시작한 거야. 애플 컴퓨터를 만들기 시작한 거야. 애플 컴퓨터 메인보드도 직접 여기서 만들었었어. 그래도 그때 재밌었던 건 물건을 만들면 바로바로 팔렸으니까 좋았지. 그때가 80년대 중반이었어.

 

옛날의 컴퓨터는 뭐가 가능했나요? 워낙 지금 컴퓨터랑은 아주 다르니까.

기본적으로 컴퓨터는 프로그래밍을 하기 위해 만든 도구야. 다른 장비에 들어가는 프로그램을 작업하기 위해 컴퓨터를 썼지. 그러다가 드라이브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게임도 할 수 있게 되고 컴퓨터 자체로 여러 가지를 하는 게 가능해진 거야. 그리고 옛날에는 컴퓨터가 흑백모니터였어. 그게 발전되어 나온 게 글씨만 녹색으로 나오는 그런 모니터고 그 다음에야 컬러 모니터가 된 거지. 옛날에는 컬러 모니터를 지금처럼 삼성 같은 국내 기업에서 만들지도 못했고 대만에서 수입해서 썼었어. 나중에야 대기업들이 나서서 생산을 하면서 컴퓨터산업에서 대만들 따라잡았지.

 

우리나라 컴퓨터 산업의 역사를 다 알고 계시는 것 같아요.

그럼. 그렇게 쭉 일하다가 직원도 많이 두고 했는데, 부도도 맞고 사업도 새로 시작하고 고생을 많이 했지만 세운상가에서 컴퓨터 쪽으로는 정말 오래 일했지. 한때는 4층에서 컴퓨터 대리점을 했어. 한글과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대리점도 하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대리점도 했지. 그렇게 쭉 하다가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니까 중소업체들의 컴퓨터가 잘 팔리지 않고, 삼성이나 LG의 메이커 컴퓨터의 가격경쟁력이 다른 시장이랑 비교가 안 됐어. 예를 들어 일반 컴퓨터는 100만 원인데 삼성 컴퓨터는 300만 원이야. 대만의 싸구려 부품을 수입해서 조립한 컴퓨터와 공장 설비를 다 갖춘 대기업에서 나온 컴퓨터는 비교가 안되는 거지. 그렇게 되면서 중소업체 대리점이 다 망했어. 중소 업체는 대기업이랑 비교해서 A/S 인력 차이가 많이 나니까.

 

 

일하시면서 제일 힘드셨던 일이나 기억에 남는 일들은 없으셨나요?

IMF 때쯤에 엄청 힘들었지. 그때는 나이도 많이 되었고, 어디 가서 취업할 상황도 아니었어. 스트레스를 엄청 받아서 이도 다 빠졌었어. 내가 스스로 회사를 없앨 정도로 힘들었지.

설명을 더 해주면, 어떤 사기꾼이 내 사업자등록 번호를 명판으로 상호도장을 만들어서 그걸로 다 세금계산서를 만들었어. 가짜 계산서를 만들어서 그 사람이 수백억을 끊어먹었다고. 결론적으로 나는 본 적도 없는데 내 회사에서 내가 팔아먹은 게 된 거지.

 

그게 가능해요?

옛날에는 국세청에 전산입력이 3년이 지나야 끝날 정도였어. 내 이름으로 입력해서 들어가도 당장은 안 나온다는 거지. 요즘은 바로 체크가 되는데… 그 허점이 있어서 중간에서 내 이름을 도용한 거야. 내가 중간에 심부름한 사람들을 수배해서 8명을 검찰청에 고발했어. 그중 6명은 심부름만 하고 2명은 진짜 해먹은 놈들이더라고. 그래서 2~3년을 감방 살았을 거야.

 

아 사업을 하다 보니 그런 일도 있으셨군요. 이런 경우는 처음 들어봐요.

그렇지. 한 번 듣고 말아.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니까… 내가 대만에 35년 전부터 형 아우하고 지내는 사람이 있어. 추석 때도 가족 전체가 그 친구한테 다녀오고 그랬어. 그 친구가 컴퓨터 관련해서 조언을 많이 해줬어. 중국 사람들이 처음에 마음을 안 열었다가 한번 사람을 믿으면 변함이 없어. 그 친구가 대만 컴퓨터 업체 회장들을 날 많이 소개해줘서 덕분에 쉽게 수입한 것도 적지 않아. 그러면서 대만 사장 자료도 많이 얻고 그랬지. 당시엔 한 달에 3~4번 출장 가고 그래서 자주 봤어. 다들 영어가 능통하지 않다보니 제품 스펙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할 수가 없으니까 발품 파는 거지. 대만에 나간 게 한 100회는 될 거야. 하늘에 돈 많이 뿌렸지(웃음).

 

힘드셨을 때도 그분이 좀 도와주셨나요?

그건 그 친구가 몰라. 내가 말을 안했어. 좋은 게 아니잖아. 우리나라 범죄자들이 설친 건데 부끄럽잖아. 그래서 그 친구는 이해를 못할 거야. 그렇게 많이 해주고 그랬는데 왜 많이 못 벌었나 싶을 거야, 그 사건을 모르니까.

 

앞으로 혹은 지금이나 관심 있는 취미나, 분야 같은 게 있으신가요?

나는 30살부터 배드민턴을 쳤어. 88체육관이 생겼을 때 거기서 운동도 많이 했지. 지금까지 한 40년 쳤던 것 같아. 그런데 하루는 다리가 아파서 병원을 갔는데 의사가 다리를 많이 써서 그러니까 그만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군. 심할 땐 절뚝거리고 그랬거든. 그래서 3년 전부터는 안 해. 체육관에서 나오라고 난리지.

 

오래 하셨으니 그분들이랑 가깝게 지내시겠네요.

그렇지. 그런데 운동으로 맺은 사회생활이라는 게, 체육관을 안 나가면 다 멀어져 버려. 물론 친한 사람도 있지. 하지만 관계가 좀 빨리 변한다고 해야 되나. 지금은 주말에 낚시나 나가고 해. 체육관 가면 뛰고 싶어서 다리가 근질근질하니까.

 

여기에서 오랫동안 일하시면서 주변 상가 상인분들이랑 친분도 많으실 것 같아요.

많이 있지. 그런데 거의 다 은퇴를 했어. 일부만 남아 있지. 내 윗대 사람들은 거의 다 은퇴를 했어. 일부만 남아 있지. 내 윗대 사람들은 거의 없고, 내 동생뻘 되는 사람들만 남아있지.

옛날에는 경기도 좋았고 다 같이 붙어살면서 오후 5시부터 술 먹으러 가고 그랬지. 그 당시에 술집이나 횟집도 많았어. 매상도 꽤 많이 올렸을 거야. 카바레나 맥주홀도 많았고. 2000년대 들면서 경기가 저물어 갔고 요즘은 경기가 옛날 같지 않으니까 그렇게는 안 해.

 

세운에서 도시재생사업, 데크사업도 진행하고 있는데 세운에 대해서 바라는 점이 있으신가요? 이 공간이 예전 모습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분들도 계시고, 어차피 예전처럼 돌아가지는 못하고, 젊은 사람들이나 관광객들도 많이 와서 사람 많은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예전에 활발했던 그 당시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한 거야. 중요한 건 이 상가에 볼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거지. 따져보니까 내가 월세 낸 것만 몇 억은 되는 것 같은데 말이야. 건물주가 40년 동안 월세를 받아먹었으면, 그 사람도 조금은 리모델링 같은 거에 대해서 투자를 해 줘야 한다는 거야. 건물주가 해야 되는 거지. 상인들이 안달복달한다고 해도 해주지 않거든. 그런 게 안 되고 있다 보니까 주변 상가가 너무 볼거리가 없어. 사람들이 흥미가 있어야 모이는 거잖아. 그래서 나는 이런 식 보다는 주변 상가를 재정비해 놓고, 그 다음에 세운을 재생시켜도 되지 않느냐는 거지.

서울시에서 다시 보행데크 공사 추진한다고 했을때 내가 직접 이런 저런 말을 몇 번 했었어. 사람이 걸어 다니는 길이 중요한 게 아니고, 사람이 여기로 오게끔 하고 걸어 다니는 길을 만들어도 늦지 않다는 거야. 길을 정비해서 주변 환경이 깨끗해지고 좋아진다고 해도 중요한 건 옆 건물들이 재개발이 되든지 해야 효과가 있는 거야.

길을 닦아서 젊은 사람들이 여기 온다고 생각해봐. 그런데 여기가 완전 할렘가 같고 다섯 시반 되면 어두워지는데 무섭단 말이야. 무슨 사람들이 오냐는 거지. 광장시장처럼 먹을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결론적으로 나는 주변의 상권이 너무 죽어있으니까 그거를 회복시키는 방법을 먼저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해.

 

외부시설 공사부터가 아니라 내부의 기존 상권을 먼저 회복시켜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그리고 여기 공사한다고 그러면 집주인들은 임대료를 올릴 생각부터 해. 임대차보호법 같은 걸 사람들이 잘 알고 집주인이 함부로 못 쫓아내도록 서울시가 신경 써 주면 좋겠어. 무작정 임대료만 올리면 상권이 다 무너져. 장사가 잘돼야 임대료 올리는 걸 이해라도 하지.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다음에 이런 문제들을 건의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필요해. 그래야 변화가 와. 우리 나이대는 이제 그렇게 말할 기운도 없어.

 

다모아컴. 세운상가 3층 바열 334호

출처 : <세운사람들>, 서울특별시 제작, 사단법인 공공네트워크(OO은대학)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