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는기술대학 네트워크코스] #3. 을지로 과학기기 산업리포트

 

<을지로는기술대학 네트워크코스> 산업리포트

지역의 정체성과 산업을 이끌었던 청계천을지로 일대 제조업체들을 중심으로 을지로 제조업의 역사와 네트워크의 특징을 살펴봅니다. 전문 에디터가 취재한 리포트를 통해 을지로 제조업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봅니다.

 

#3. 을지로 과학기기 산업리포트
글/사진 : 조승한 기자

 

종로3가 일대 과학상점의 태동과 현재

[그림 1. 과학상점이 모여있는 종로 3가 ⓒ 조승한]

1960년대 청계천 일대에 소규모 제조업이 생겨나기 시작하며 이들이 필요한 화공약품을 취급하는 업체들도 인근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화공약품 업체들이 종로 3가 근처에 모여들면서 화학 실험에 필요한 시약을 구하기 위한 학교, 대학, 회사 또한 이곳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들의 수요에 따라 화공약품을 취급하던 업체들이 취급 품목을 실험기구로 조금씩 확장하면서 과학상점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에는 시약판매점과 유리 실험기구를 제작하는 과학상점들과 이러한 제품을 수입해 판매하는 업체들도 종로 3가로 모이면서 지금의 상권을 만들었다. 1970년대부터 1985년까지는 종로 인근에 1, 2, 3호선 지하철이 계속해 생겨나며 상권으로써의 가치가 높아지던 때다. 과학상점들도 종로에 거취를 둔 다른 상점들과 마찬가지로 서울 중심부에 있어 서울 소재 고객이 찾아와 구매하기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1980년대는 산업이 발달하고 단순 제조업에서 신제품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제조업의 흐름이 이어지면서 과학상점이 취급하는 실험용 기기를 다루는 연구개발(R&D)의 수요도 늘었다. 과학상점도 이러한 흐름을 타고 성장한 업종 중 하나다.

2021년 1월 기준 종로3가 일대에 남아있는 과학상점은 약 30곳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대부분 대학 연구실과 기업 실험실에 납품하는 업체들이다. 종로3가 12번 출구 앞 세진과학 뒤로 이어지는 골목에 주로 위치하고 있다. 중고등학교 교보재용 실험기구를 판매하는 업체들도 있으나 종로 3가 북쪽 귀금속 상가 뒤편으로 넘어가 따로 상권을 구축한 상태다. 임대료 때문에 종로 큰길의 갈래 대신 큰길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넘어간 것이다.

일대 상인들은 종로 3가의 과학상점이 과거보다는 조금씩 줄고 있다고 증언한다. 2000년대 초 인터넷이 확산하기 시작하며 단순한 과학 도구들은 직접 찾아오지 않고도 전자상거래를 통해 구매할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 종로 3가의 지리적 장점이 줄어들었다. 사무실을 서울에 유지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외곽으로 옮기는 업체가 많아졌다. 과학상점 자체가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종로 3가에 적을 둘 필요성은 옅어졌다.

 

취급하는 품목들

[그림 2. 과학기기를 주문제작받는 과학상점 ⓒ 조승한 ]

화학과 관련한 실험 시약과 실험기기를 주로 판매한다. 실험기기는 주로 비커나 플라스크, 증류장치 등 유리 실험기구가 주를 이룬다. 저울이나 온도계 등 실험에서 이용하는 제품 대부분을 취급한다고 보면 된다. 과학상점이 모여있는 거리 일대를 거닐면 외부로 전시돼 있는 비커, 플라스크 등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과학상점별로 특수한 제품을 취급한다거나 하는 특이성은 보이지 않는다.

실험에 쓰일 장치를 주문제작하는 경우도 많다. 연구개발의 특성상 특정 연구를 위해 특수한 실험 등이 필요할 때는 그에만 맞는 장비를 제작하는 일이 많다. 이 경우 특수한 장비를 찾아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 도면을 주고 새로 제작을 의뢰하는 경우도 있다. 도면을 그린 연구자들이 실험기기 제작에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도면에 대한 검수를 진행하고 제작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

과학상점은 제품을 어떤 실험에 쓰는지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과학 장비에 대해서는 전문가이지만 연구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설명해도 알아듣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도면을 만들어달라는 대로 만들다 보면 실제 실험에 맞지 않는 경우도 생겨난다. 이때는 실험실을 방문해서 다시 확인하고 장비 조율을 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실험제품을 취급하는 만큼 가장 중요한 것은 정밀도다. 때문에 종로3가 과학상점은 도량형을 재는 기술자들과 긴밀하게 연결돼있다. 부피와 같은 수치를 정확하게 측정하고 검증해주거나 눈금 등으로 표시해주는 일을 하는 기술자들이다. 도량형을 재는 업체들은 보통 서울 외곽에 존재하기 때문에 실험제품을 보내고 측정을 거친 후 다시 가져오는 형태로 운영된다.

 

고객층

[그림 3. 세진과학 ⓒ 조승한 ]

서울 소재 대학과 기업의 실험실을 주 고객으로 삼고 있다. 특히 대학원 실험실이 주 고객으로 있다. 대학에서도 화학과, 신소재공학과, 재료공학과 등 시약과 실험기구가 필요한 과에서 주로 찾는다. 과거에는 초등학교나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도 시약과 실험기기를 구매했으나 최근에는 뜸해진 것으로 보인다. 대신 과학 실험을 수행하는 과학 학원도 고객 중 하나로 추가되는 분위기다.

주 고객이 경기가 어려워도 진행되는 연구개발(R&D)업과 연관됐기 때문에 크게 경기를 타지 않는다. 다른 소상공인들과 달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영향에도 큰 피해를 받지 않는 편이라는 전언이다. 다만 온라인 판매 비중이 점차 늘어나는 만큼 가게에서도 온라인 손님을 주로 대하고 거래 형태 변화를 준비하는 중이다. 홈페이지나 이메일에서 견적을 받으면 주문을 택배나 퀵서비스로 보내는 방식이다.

간간이 과학상점을 들르는 고객도 있으나 단골 거래가 주를 이룬다. 한 실험실에서 구매를 한번 시작하면 인연을 맺고 계속해 계약하고 납품하는 방식이다. 단골이 된 실험실이 다른 실험실에 과학상점을 소개하면서 점차 고객이 늘어난다. 거래층이 확실하고 수가 일정한 만큼 새로운 활로를 열기 위한 홍보나 영업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반면 기업 같은 경우는 실험실이 업황 등의 이유로 사라지면서 단골이 사라지기도 한다.

단골인 연구자들은 통상 대학의 이공계 대학원생이나 연구소의 연구원들이다. 대학원생은 박사과정을 마칠 경우 보통 6년, 연구소 연구원들은 더 오랜 기간 일하는 만큼 오래 단골을 유지한다. 그 과정에서 단골과 과학상점과의 다양한 에피소드가 생겨난다.

세진과학은 과거 오프라인 매장으로 손님이 찾아왔던 시절에는 화공약품을 다루는 법과 같은 전문지식을 오히려 과학상점에서 연구원들에게 알려주는 사례도 많았다고 회상한다. 학생들이 오전부터 와서 진을 치고 있으면 점심때는 함께 국수도 사 먹고 술도 마셨다는 후문이다. 세진과학에서 구매한 실험기구를 활용해 성과를 내고 받은 박사학위 논문 속 ‘사사’에 세진과학의 이름을 넣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초자 제조업

[그림 4. 초자를 가공하는 작업대  ⓒ 조승한]

종로 3가 과학상점이 다른 과학상점과 다른 독특한 점은 주변의 제조업과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점이다. 유리 실험기구, 일명 ‘초자’라고도 부르는 유리기구를 제조하는 업체들이 종로 3가 뒤편 골목으로 점점이 늘어서 있다. 이들은 고객과 바로 상대하지 않고 주로 주변 과학상점이나 다른 유통업체의 의뢰를 받아 설계도를 받아 그대로 제작하는 식으로 제조를 수행한다.

비커나 시험관처럼 수요가 많고 크기가 정확한 제품은 기성품으로 판매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실험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제품을 제조한다. 가령 진공장치를 제작하면 진공을 잡을 팔을 3개 만들지 혹은 4개 만들지, 팔의 형태는 어느 쪽으로 꺾을지 등을 실험자가 원하는 대로 제작해 주는 것이다. 고객이 설계도를 가지고 오면 이를 개인이 가공해 제작해주는 형태다.

유리 기구는 다양한 두께의 유리 튜브를 1000도 가까운 열을 이용해 녹여내고 붙여 원하는 형태로 가공해 제작한다. 때문에 종로3가 골목에서는 밖에서 보면 불이 번쩍번쩍하는 광경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제작에 쓰이는 유리 튜브는 모두 외국에서 수입해 들어온다. 개인이 가공하는 수요가 많지 않기 때문에 한국에서 제작해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분야라는 설명이다.

제작하는 제품은 매년 새롭게 발표되는 연구들만큼이나 다양하다. 최근에는 수질이나 대기 입자를 포집하는 데 쓰이는 실험기구 제작 의뢰가 많아졌다고 한다. 연구 트렌드가 판매 품목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또 유리 공예를 원하는 예술가들이 와서 공예품을 제작해달라는 의뢰도 조금씩 느는 추세다. 새로운 시장이 조금씩 열리는 셈이다.

유리 실험기구 제조업은 주변 청계천 제조업 생태계와 떨어져 있는 것처럼 비치는 과학상점이 주변 생태계와 유기적으로 연결되게 만드는 가교역할을 한다. 실험기구 제작에 필요한 성형틀이나 나사산은 주변 선반집과 같은 소규모 제조업체를 통해 제작된다. 기술자들은 유리 가공의 원리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수십년 간 함께 일하며 노하우를 갖춘 주변에서 제품을 제작한다고 설명한다.

 

유리 기술자들

한국의 유리 가공 기술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서 들어왔다. 지금의 유리 기술자들은 약 4~5세대인 셈이다. 한국에는 약 200명 정도가 남아있다. 전국에 수요가 있는 만큼 기술자들은 전국에 분산돼 있다. 다만 기술이 필요한 제조 분야 대다수가 그렇듯 기술자들의 연령대가 점차 높아지는 것은 위험 요소다.

과학상점과 마찬가지로 경기를 타는 업종은 아니나 업체의 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종로 3가에는 현재 인가공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가 약 20곳 정도 남아있는 상황이다. 주로 1인 업체인 기업이 많은데 사장이 은퇴하면 이를 새로 배우는 사람이 없어 그대로 업체도 사라지는 형태다.

 

글쓴이 : 조승한 
동아사이언스 데일리뉴스팀에서 과학기자로 일하고 있다. 과학기술분야 전반을 취재하며 새로운 과학기술들 외에도 과학기술이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사회적 분야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이 글은 OO은대학연구소의  <지역문제해결시민실험실> ‘을지로는기술대학-네트워크코스’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되었습니다.